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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을 좌우하는 '심리학적 토대' 구축에 대한 단상심리 단상 2019. 6. 8. 00:31
ⓒflickr by CollegeDegrees360 상담심리학 석사 과정은 단순히 학업 성취 이상의 도전과 갈등을 유발한다. 공부하고 연구할수록 기존의 믿음과 가치체계가 요동친다. 단순히 이론 습득의 어려움을 넘어, 인생 자체의 방향을 좌우하려고 하는 이 녀석과 늘 팽팽한 줄다리기를 벌인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던 옛 말을 떠올려본다. 상담? 그까짓거 그냥 상대방 이야기 잘 들어주고 몇 가지 기술로 대화 좀 하면 되는 일이 아니겠느냐고 무식 하디 무식한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프로 겸손 왕'이다.. '상담심리학'이라는 거대한 세계 앞에서 노오랗게 잘 익은 벼가 되었다. 어찌나 유연하게 몸뚱이를 숙이는지 모른다.
상담심리학은 사실 사회과학이라고 하기엔(왠만한 심리학과는 사회과학대학에 설치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인문학, 철학에 가까운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각 이론과 주의(-ism)마다 고유의 세계관과 인간관을 뿌리로 두고 있는데 이건 굉장히 철학적이고 근본적인 지점이다. 가장 비근한 예로 10대 시절에 학교에서 들어봤을 법한 '맹자의 성선설, 순자의 성선설'과 같이, 인간을 어떻게 규정하고, 그 인간을 구성하는 세계는 어떠하며, 인간과 세계가 어떻게 상호작용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 이해가 제대로 선행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제대로 된 상담을 할 수 있는 출발점이다.
상담심리학의 흐름은 크게는 3~4가지의 흐름으로 나눈다. '인간 하나에 상담심리 이론 하나'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인간이 얼마나 복잡다난한지를 말해주기도 하지만, 큰 흐름에서는 다음과 같다.
1. 정신역동적 흐름 (프로이트, 융, 아들러, 에릭슨 등)
2. 인지행동적 흐름
3. 인간중심-실존주의적 흐름
4. 다문화주의 (더 나아가, '사회구성주의'까지)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Psychoanalysis을 주창한 이후, 인간 내면의 무의식 과정에 대한 심리학적 토대가 세워진다. 이후 칼 융과 아들러가 무의식 세계는 인정하면서도 프로이트와는 다른 관점으로 인간을 바라보는 것이 큰 틀에서의 정신분석학의 흐름이다. 이후 전개되는 이론들은 이 정신역동적 관점에 반대하며 나오는 흐름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현재 심리학의 주류인 과학적 행동주의를 기반으로 한 계량 심리학, 실험심리학은 사실 마음 현상을 눈에 보이는 행동 관찰을 토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의 심리학(Psychology) 부르는 것을 개인적으로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인간 행동 과학'이라고 해야 더 적확하다).
사실 심리치료, 심리상담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는 여러가지로 말할 수 있겠으나, 단도직입적으로 보면 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다. 그러니 돈과 시간을 할애하여 우리는 공부하고 상담을 받는다. 그런데 막상 상담자, 치료사 입장에 서서 공부를 시작하려고 보면, 어떤 이론을 뿌리에 두고 나아가야 할지 막막한 경우가 많다.
특히 나의 경우는, 정신역동적 흐름과 비정신역동적 흐름 사이를 나누는 지점인 '무의식, 유아동기 초기 경험'을 어느 정도로 인정할 것이냐에 대해 요즘 엄청난 내적 갈등과 고민이 쌓이고 있다. 프로이트, 융, 아들러, 에릭 번, 에릭슨 등 정신역동 관점의 다양한 이론들을 보고 있노라면 역시 유년기 경험이 중요하며, 인생에 마치 각본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 칼 로저스, 게슈탈트, 빅터 프랭클과 같은 인간 중심, 실존주의적 관점을 보고 있노라면 지금 여기의 나의 감정과 태도가 중요하지 무슨 어릴 적 경험이 나를 잠식하느냐고 개탄하게 된다. 물론 무 자르듯 경계를 완전히 구분 짓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유년기 경험은 누가 뭐래도 매우 중요한 것이며 지금-여기에서의 나의 욕구와 감정을 기반으로 한 선택과 의미 추구 역시 중요하다. 이 모든 게 조금씩 어우러져 내가 된 것이니까.
그럼 이렇게 화해가 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명확한 답, 올곧은 토대를 찾으리라 맘을 먹게 된다. 아마 나의 인생은 나의 선택으로 오롯이 이루어진 자유롭고 창조적인 것일까? 이미 어렸을적부터 쌓여 무의식 속에 프로그래밍된 어느 정도의 한계와 각본이 있는 것일까? 나는 명리학을 함께 연구하는 만큼, 어느 정도 운명의 항로가 정해진 느낌을 믿지만, 머리로는 실존주의적인 창조력을 지향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마음이다. 그럼 그냥, '유년기 경험으로 인해 어느 정도 인생의 각본은 정해졌지만, 나의 자유의 지도 만만찮게 인생에 작용한다.'정도로 마무리 지으면 될까?
오늘도 잠 못드는 밤이다.
20190608
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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