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리상담, '명리'인가 '사람'인가?
명리를 안지 어언 10여년이 흘렀다. 독학을 오래 했지만, 다양한 분을 만나 상담과 분석을 받으며 직간접 경험을 통해 명리 세계를 하나씩 배워왔다.
나의 생년월일시가 바뀌지 않는이상, 사주팔자 구성이 변할리 없다. 때문에 늘 같은 모양의 기호를 눈 앞에 두고도 서로 다른 방식과 실력의 편차를 보여주는 행태가 재밌기도 하면서 때론 실망감이 들기도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러 고수를 찾아가 그렇게도 많이 사주명리를 확인하는지도 모르겠다. 역술인구가 많은 만큼 그만한 개성이 있다는 소리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지금까지 아쉽게도, 말은 사주'상담'이라 해놓고, '상담'은 커녕 눈앞의 '여덟 글자'에만 혈안이 되어 정작 눈앞에 있는 나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딱히 전문적으로 오가는 말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냥 사람 앞에 앉혀놓고 (혹은 전화 연결을 해 놓고) 몇 마디 질문과 대화를 나누고 자기 할 말만 하면 그것이 '상담'이라고 통용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상담은 그냥 대화를 나누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사회의 풍토가 크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명리학은 년월일시에 배속된 십천간과 십이지지의 상징을 통해 인간사를 들여다 보는 것이므로, 8개의 부호ㅡ지장간, 대운, 세운 까지 합치면 더 되겠지만ㅡ에 함축된 은유와 보이지 않는 역동을 얼마나 깊이 적확하게 읽어내느냐가 관건이다. 하지만 정작 내 자신이 상담심리대학원에 다니면서 심리학과 상담심리, 심리치료 등을 배우고 보니, 상담은 단순히 대화를 나누는 수준을 넘어, 높은 전문성과 수 많은 임상 실습을 통해 언어적 대화 이면의 마음과 무의식을 심층적으로 들여다보거나 표상된 행동을 교정시키기 위한 인지적 접근을 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명리가, 역술가에게 엄밀한 의미에서의 '심리상담'을 요구하는 것은 어쩌면 무리일 수 있다. 정작 전공하는 상담심리학도들도 평생에 걸쳐 갈고 닦아야 하는 것이 '상담'인데, 명리학 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에 심리학 기반의 상담을 하라고 하는 것은 너무 앞서가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하지만 이제 세상이 달라지고 있다. 큰 이동이 없어 변화의 폭이 적은 농경사회는 이미 지났다. 이제는 편리한 이동수단과 영상 기반의 엄청난 양의 데이터와 저장기술, 무한에 가깝게 늘어나는 콘텐츠 등 한 개인이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늘 열려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자는 그런 단순한 패턴의 일상이 아닌, 늘 자연의 순리를 벗어나 엄청난 양의 정보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인간이 중심이다.
이제는 옛 사람과 현대 사람을 동등한 선상에 놓고 비교해서는 안된다. 같은 대자연, 대우주의 이치를 받는 소우주 덩어리의 사람일지라도, 자연 그대로 맞추어 살아가는 사람과 자연을 거스른 문명과 기술의 혜택을 받는 사람은 전혀 다른 종족이다.
이젠 귀납적으로 만들어진 이론에만 기댈것이 아니라, 눈 앞의 사람을 봐야 한다. 더 이상 여덟 글자 그대로 해석될리 만무하다. 내담자가 살아온 많은 이야기를 들으며 사주팔자가 보여주는 기운을 잘 비교대조확인을 하면서, 역으로 그 무게 중심을 내담자(사람)에게로 옮겨야 한다. 무리하게 내담자의 인생을 맞추려고 하지말고, 눈 앞의 존재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먼저 이야기를 들어야만, 비로소 여덟 글자의 해석의 미완의 퍼즐이 완성될 것이다.